모든 것이 수동적 태도로 일관…시류에 휩쓸려 쫓아가는 듯한 양상 / 10년 후 잊혀질 지금의 건축사, 한국건축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 김광현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

1971년 3월에 건축학과에 입학하고 2학년에 올라가 서양건축사를 배웠을 때 ‘nave’를 일본어 번역어인 신랑(身廊)이라 배웠고, ‘transept’는 익랑(翼廊)이라고 배웠다. 또 세 부분으로 나뉜 성당의 가운데 부분을 ‘nave’라고 잘못 배웠다. 누구 하나 이 기본의 기본이 되는 용어조차 바로 잡고자 하는 바 없었기 때문에 지금도 서양건축사 시간에 이 용어는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학문과 실천 분야가 또 있을까? 그러니 진정 ‘건축학’이라는 것이 이 땅에 제대로 존재하는 것일까?

올해는 여러 지방에서 매회 200여 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건축을 가르치고 있다. 그때마다 김중업, 김수근을 아느냐 했더니 모두 안다고 했다. 그 다음에 누구를 아느냐 했더니 오늘날 유명해진 건축사 이름 둘을 들었다. 그게 아니고 1970년대에서 1990년 사이에 우리나라에서 활약한 건축사 이름을 말하라고 했더니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 그게 다였다. 그러면 세지마 가즈요, 니시자와 류에, 반 시게루는 아느냐 했더니 모두 안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지금 우리나라를 이끄는 사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하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강연장은 조용했다. 아니, 아예 그런 식의 질문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게 뭔가? 10년 후에 다 잊혀질 지금의 건축사와 건물을 짓는 한국건축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 사실은 하나의 에피소드가 아니다. 지금 오늘의 우리 건축에는 이렇게 아주 큰 구멍이 심하게 뚫려 가고 있다.

건축은 진리를 찾는 학문이 아니다. 건축은 뭐든지 종합해서 생각해야 하는 고도의 지식 산업이다. 그러나 조금 나쁘게 말하면 매우 심각한 ‘잡학’이다. 그래서 심각한 생각이 없어도 건축물은 얼마든지 지어질 수 있다. 게다가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이 사회는 건축으로 굳이 진지하게 생각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에 익숙하다. 이율배반적이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배경 때문에 건축교수나 건축사들은 자기를 향해서는 심도 있게 생각할지언정, 실제의 작업 속에서는 이런 생각이 오히려 방해한다고 여길 때가 많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건축이 다른 분야에 앞서 있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건축 이후부터는 건축은 다른 분야를 뒤따라가게 되었다. 근대에 들어와서 잘 나가는 분야의 논리를 건축이 따라 뒤쫓아 가는 이런 현상이 아주 심해졌다. ‘해체’가 유행할 때는 해체건축을 하자고 하더니, 철학과 사회학에서 ‘경계’가 사라진다고 하니까 너도 나도 현상 설계와 졸업전에 ‘경계를 넘어서’라는 말을 유행어처럼 사용했다. ‘풍경’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도시풍경’, ‘문화풍경’, ‘거주풍경’, ‘성서적 풍경’ 하며 좋은 말 많이 만들어 늘어놓았건만, 그래서 얻은 게 무엇이며 무엇이 축적되었다는 것인가? ‘풍경’이라는 개념이 건축의 현실에 정말 제대로 적용된 것이 얼마나 있었는가? 다 헛소리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이러는 사이에 이른바 ‘인문학적 건축’, ‘건축인문학’도 나타났다. 그러나 이것은 인문학 열풍에 힘입어 나타난 이름이지, 건축에서 진지하게 숙고하며 생긴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건축인문학이라는 것은 따로 없다. 물론 이 의견에 반대하여 건축은 인문학적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분도 계실 것이다. 그렇다면 묻겠다. 그러면 그 전에는 그 인문학적인 것의 내용을 말하지도 않고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않았는가라고. 그러면 왜 100년 전, 50년 전, 아니면 10년 전에는 그런 말이 왜 없었는가? 이런 것은 굳이 인문학이라고 따로 떼어 말하지 않았으며, 이 모든 것을 ‘건축학’이라는 이름으로 신중하게 다루어 왔다. 따라서 건축인문학이 따로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건축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이일 가능성이 많다. 인문학 대세의 열풍에 동승하여, 있지도 않은 용어로 따로 떼어 말한다면 그것은 건축의 본령을 크게 훼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각종 매체를 통해 건축을 예쁘고 재미있게 묘사하는 이들도 제법 있지만 그 내용을 들어다보면 건축적 사실을 크게 왜곡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물론 오래 전부터 건축은 다른 영역에서 논리를 빌려 왔다. 그러다가 점차 다른 분야에 끌려가기 시작하여 18세기에 이르러 건축은 이상적인 대상을 찾아 자기 논리를 펴기 위한 모델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다른 분야를 빗대어 말하고 그것을 유추하여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건축은 우세한 문화와 논리를 늘 질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는 건축이 학문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실무적으로나 제도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사회의 앞에서, 다른 분야에 앞서서 주장을 이끌며 제시한 것이 별로 없었다. 건축이 모든 분야를 건축이 이끈다고 믿고 있다면 그것은 마음속으로만 건축을 사랑하는 데에서 비롯한 것이다. 우리의 건축은 이런 식으로 늘 현실에 앞선 것에 눌린 채 그것을 계속 뒤쫓아 갔다.

그런데 요사이 우리나라의 건축계가 다른 분야를 뒤쫓아 가는 현상은 아예 맥을 잃은 것 같다고 여겨질 정도로 심각하다. 한때 친환경건축을 해야 한다고 건축계가 들썩거렸다. 그때 지속가능한 건축, 녹색건축, 생태건축이 중시되며 일정 규모에 친환경설계를 의무화했기 때문이다. 이때 건축사사무소의 많은 이들이 수동적인 입장에서 친환경 건축을 공부했지 건축의 업역을 확장하기 위해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건축하는 사람 모두가 친환경 전문가가 되었는지 이에 대한 기사도, 프로그램도, 기술 개발도 더 이상 논의되고 있지 않다. 더욱이 모범이 될 만한 우리나라의 새로운 친환경 건축도 별로 소개되지 않고 있다. 그간 ‘친환경건축설계아카데미’는 1000여 명 이상의 수료생이 거쳐 갔다. 그런데 지금은 친환경건축전문가 인증제에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하고 그 교육을 다른 곳에 넘긴 채 끝나고 말았다. 그것이 우리 건축계가 친환경을 대하는 태도의 끝이었다. 건축설계에서는 기술도 하나의 유행이었던 셈이다.

재개발·재건축과 달리 낙후한 지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 도시를 다시 살리자는 ‘도시재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이것 또한 건축계가 오래 전부터 주장하고 제기한 것이 아니라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에 따라 나타난 겉보기 열풍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도시재생은 ‘도시’가 붙어서 그렇지 엄밀하게 건축의 중심 과제다. 그런데 엄연히 건축사인데도 주민이 주도하는 건축 중심의 도시재생의 종사자나 활동가가 되려면 4회 정도의 교육을 받고 수료증을 받아야 사업에 참여할 때 가산점을 받는다고 하여 건축사들이 이 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는가? 건축사는 왜 새로이 도시재생 사업을 위해 단기간의 교육을 받아야 하는가? 4회 정도의 교육으로 건축사가 재생 전문가로 양성된다면 그 건축사를 재생 전문가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우수한 건축사를 가려 뽑기 위한 편법에 지나지 않는다. 단적으로 도시재생의 이슈를 건축계가 스스로 발전시키고 전개하지 못했기 때문에 끌려가는 현상의 하나다.

이와 비슷한 양성 교육이 하나 더 있다. ‘학교공간 혁신 촉진자 교육’이다. 건축학회도 학교공간혁신사업에 참여할 인력을 양성하는 교육 과정을 이수하면 ‘촉진자 연수 이수증’을 발급하고 활동기회를 소개해 준다고 한다. 그 이름은 ‘공간혁신 촉진자’(퍼실리테이터)라 한단다. 그러나 이것은 좋은 설계자에 의해 좋은 학교 건축이 지어진다고 보기 전에 공간으로 해석해 주는 전문가를 양성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대한건축사협회도 마찬가지다. 4시간의 교육과정을 이수한 건축사에게 협회장 명의로 발급하는 ‘학교공간혁신 촉진자 교육 이수증’으로 전국 시도 및 지역 교육청에 이름을 올려준다고 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4시간 교육 받아 그 ‘촉진자’가 되었다 하자. 이렇게 배운 사람이 어떻게 ‘학교 건축의 전문가’로 승격된다는 말인가? 이런 식이라면 건축학 전공을 5년이나 할 필요가 없다. 그저 5달만 배우고 ‘건축설계 촉진자’ 자격을 준다고 하면 되지 않겠는가?

여기에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도시에서 공공건축가 제도가 널리 퍼지고 있다. 일견 좋은 일이다. 불과 10수 년 전만 해도 거의 거론하지 않던 ‘공공성’, ‘공공건축’이 건축계의 중심어가 되었고, 그만큼 건축사들이 공공건축에 관여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로써 건축사들은 공공건축을 이전보다 많이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서울특별시 공공건축가 운영 규칙을 보면 의무와 윤리만 가득하고 그에 대한 혜택에 관한 조항이 별로 없다. 그렇지만 공공건축가는 공공의 일을 맡아서 대신 일처리를 해 주는 봉사자가 아니다.

그래서 공공건축가들에게 묻고 싶다. 공공건축가들은 위촉 기간에 무엇을 얻었는가? 공공건축가로서 행한 업무가 진정 ‘공공’의 본질에 닿아 있었으며, 공공건축가라는 명칭에 맞게 정확한 권리와 책임이 공정하게 주어졌으며 또 그렇게 실천했는가? 정당한 대가를 받았으며, 그 일을 수행하는데 행정은 적절한 지원을 해 주었는가? 공공건축가 중에서도 특정한 공공건축가들이 프로젝트 참여에 집중되어 있지는 않았는가? 설계공모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공공건축가들이 평가위원으로 참여해 또 다른 공공건축가를 당선작으로 선정한 적은 없는가?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이런 문제를 반드시 느꼈을 터인데도 나서서 말하는 공공건축가를 본 적이 없다. 모두 만족하는 모양이다. 한편 공공건축가들이 따로 모여서 이런 정책을 펴 달라고 합의를 거쳐 제안해 보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총괄건축가는 왜 시장과 도지사가 지명하는가? 공공건축가들이 모여 공공건축의 방향을 정한 후, 공공건축가 중에서 총괄건축가가 선출되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총괄건축가는 시장이 임명하고 공공건축가는 따로 모집한다면, 건축사들을 또 다른 위계로 조직해버린 셈이다.

그렇다면 공공건축가는 공공건축 시장에서 활동을 허락받은 자 정도이며, 공공건축가 제도는 건축설계의 공공 일자리 만들기 사업 정도가 된다. 그런데도 공공건축은 건축사를 위한 시장의 확대라고만 여기고 직원이 없는 1인 건축사들이 많아진 이때 공공건축이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시장으로만 여기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도 공공건축 시장이 확대되니 어떻게 공정한 심사를 담보하는가, 오직 건축사만이 심사하게 하여야 하지 않는가, 응모자가 과도하게 지출하지 않게 간소한 양의 제안서를 제출하게 하자는 것에만 주로 관심이 가 있다. 여기에서도 수동적인 태도는 계속되고 있다. 참 답답하다.

이는 건축사나 건축전문가들이 사태를 직능인으로 앞서 해석하고 판단하지 못하고, 늘 그래왔듯이 주어진 과제에 대한 수동적인 문제 해결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건축을 배우기 시작한 지 50년 동안, “건축은 기술이 아니에요, 문화로 이해해 주세요, 건축은 건설과 달라요, 예술에 속하는 것이에요, 건축의 설계대가가 너무 낮아요, 심사가 불공정해요, 심의 허가제도에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어요”라는 말을, 학교에 입학하여 42년 간 교수로 정년퇴직할 때까지 정말 오랫동안 들어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특징은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는 데 있다.

반대로 건축은 공공을 이렇게 해석한다, 도시는 이렇게 재생되어야 마땅하다, 건축을 기술과 함께 이런 것을 추구한다, 그러려면 우리 사회는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 아파트가 뭐가 나쁜가, 이런 방식으로 도시 공동체를 다시 보완하자, 새로운 주거형식으로 이렇게 국가와 지자체가 받아들여야 한다와 같은 능동적인 사고로 사회를 이끌어보겠다는 말과 연구로 제안하고 이에 대한 실천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건축설계가 공공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라, 대부분의 건축설계는 수주하는 과정이나 해결하는 결과가 모두 상업적 설계에 속한다. 사회문제를 의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디자인’으로 사회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건축, 그래서 누군가에게 늘 고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건축물을 제안하고 실천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이런 것이어야 제대로 된 공공적 건축이다. 소승불교(小乘佛敎)와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 말하는 ‘승(乘)’이란 수레를 뜻한다. 그렇듯이 사회의 많은 사람을 태워 주는 건축인 ‘대승건축(大乘建築)’을 미리 제안하고 실천하는 것이 공공적 건축이고 건축의 공공성이고 넓은 의미의 공공건축가다. 이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런 복잡한 생각을 하며 우리의 건축계에 이런 질문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과연 이런 글로 많은 동감을 얻을 수 있을까? 괜한 시비로 비칠 것 같은 두려움도 든다. 그러나 이런 글을 앞으로 몇 개나 쓸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지금이라도 이런 물음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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