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偶吟(우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우연히 시로 읊다- 송한필(宋翰弼) 花開昨夜雨(화개작야우)어젯밤 비에 피어난 꽃이花落今朝風(화락금조풍)오늘 아침 바람에 지는구나可憐一春事(가련일춘사)가련하다 한 봄의 일이여往來風雨中(왕래풍우중)비바람 속에 가고 오누나- ‘운곡집(雲谷集)’ 중에서/ 1622년송한필은 조선 선조때의 문인이다.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계응(季鷹), 호는 운곡(雲谷)으로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의 동생이다. 어릴 때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나중에는 온 가족이 노비로 전락해 추노꾼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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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4.04.25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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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랑하게 되었을까- 채상우이미 시작되었다 그것은시작되자마자 사라지고 있다 그것은사라지면서 시작되고자 한다몰래 피어나 버린 꽃처럼 흘러오고흘러가는 강물처럼시작되면서 사라지고 있다전격적으로 매일매일사라지면서 시작되려 한다 그것은너에게도 죽을 마음이 남아 있는가나무가 제 그림자 속에 뼈를 감추듯사라지면서 시작되고 있는 - 채상우 시집 ‘리튬’ 중에서 / 천년의 시작/ 2013년우리는 종종 사랑하는 대상과 사랑이 하나였다고 주장한다. 그로 말미암아 내 사랑은 그 사람을 잃는 순간 텅 비어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롤랑 바르트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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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4.04.11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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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묻는다- 이영유 가을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풍성하고 화려했던 언어들은 먼 바다를찾아가는 시냇물에게 주고,부서져 흙으로 돌아갈 나뭇잎들에게는못다 한 사랑을 이름으로 주고,산기슭 훑는 바람이 사나워질 때쯤,녹색을 꿈꾸는 나무들에게소리의 아름다움과소리의 미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거친 대지를 뚫고 새싹들이온 누리에 푸르름의 이름으로 덮일 때쯤한곳에 숨죽이고 웅크려나는 나를 묻는다봄이 언 땅을 녹이며 땅으로부터올라온다 - 이영유 시집 ‘나는 나를 묻는다’ 중에서/ 문학과지성사/ 2007년간암으로 투병 중인 시인의 집에 찾아 갔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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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4.03.26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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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정진규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지금 대낮인 사람들은별들이 보이지 않는다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별들이 보인다지금 어둠인 사람들만별들을 낳을 수 있다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 정진규 시집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중에서/ 문학세계사/ 1990년성경에는 저 유명한 포도밭 일꾼의 비유가 나온다. 아침부터 일한 자들과 오후가 되어서 농장에 온 일꾼들이나, 다 같은 임금을 받는 것에 먼저 온 일꾼이 불만을 토하자 “먼저 온 자가 나중되고, 나중 온 자가 먼저 된다”고 농장 주인은 말한다. 이 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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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4.03.14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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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프로젝트- 정진혁 뻐꾸기는 울 때 뻐꾹뻐꾹 울지 않는다 뻐억~꾹 뻐억~꾹 울면서 송홧가루가 목에 걸린 듯 울면서 느린 맛 하나를 온 마을에 툭 던져 준다 봄을 우리는 봄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 봄은 보~~오~~ㅁ이라 불러야 한다 기다렸다고 기다렸다고 보~~오~~ㅁ 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보~~오~~ㅁ 부르며 계절 하나를 우리 가슴에 묻어 둔다 계절 하나를 아껴 써야 한다 뻐억~꾹 뻐억~꾹 보~~오~~ㅁ 보~~오~~ㅁ 계절 하나가 목에 턱턱 막히며 자꾸 길어진다- 정진혁 시집 ‘드디어 혼자가 왔다’ 중에서/ 파란/ 2023년플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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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4.02.26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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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김석영양의 울음은 기도다어둠 속에서 한 손을 말아쥐고 주먹이 되기 전까지어둠을 꼭 누르기 전까지만망원경이 될 수 있다 눈은 어두운 곳에서만둥근 출구를 볼 수 있다올라가야 할 높이는 주먹 안에 있다손바닥을 펴면 하늘은 평평해졌다 천장 아래에서 종일 우는 양 우물은그의 목소리를 되돌려 줬다 - 김석영 시집 ‘돌을 쥐려는 사람에게’ 중에서/ 민음사/ 2022년천체망원경은 우주의 어둠을 본다. 어둠을 보지 못하면 그 가운데서 빛나는 별들을 볼 수 없다. 기도는 전망, 아니면 우러름이다. 죄를 사하고자 하는 기도는 과거를 본다.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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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4.02.07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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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짓날- 김지하첫봄 잉태하는 동짓날 자시거칠게 흩어지는 육신 속에서샘물 소리 들려라귀 기울여도들리지 않는 샘물 소리 들려라한 가지 희망에팔만사천 가지 괴로움 걸고지금도 밤이 되면 자고해가 뜨면 일어날 뿐아무것도 없고샘물 흐르는 소리만귀 기울여 귀 기울여 들려라 - 김지하 시집 ‘별밭을 우러르며’ 중에서/ 솔/ 1994년동지는 양력 12월 22일이나 21에 든다. 이 시기가 음력 11월의 어디쯤에 해당하는지에 따라 동지는 다시 애동지, 중동지 노동지로 나뉨다. 애동지는 음력 11월 10일이 채 못되어서 드는 동지로 이때는 팥죽을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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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4.01.26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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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 16- 김영승술에 취하여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술이 깨니까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다시는 술마시지 말자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 김영승 시집 ‘반성’ 중에서/ 민음사/ 2014년후래자삼배(後來者三盃)라는, 술꾼들 사이에서 횡행하는 강제가 있었다. 술자리에 늦은 사람은 술 석 잔을 거푸 마셔 일찍 온 사람들과 어느 정도 취기를 맞춰야 한다는 화류계(?)의 불문율이다. 개인적으로는 별로 따르고 싶지 않는 강제지만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취기가 다르면 언어가 달라질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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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4.01.12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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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꽃 - 김영태 과꽃이 무슨기억처럼 피어 있지누구나 기억처럼 세상에왔다가 가지조금 울다 가버리지옛날같이 언제나 옛날에는빈 하늘 한 장이 높이 걸려 있지 - 김영태 시집 ‘누군가 다녀갔듯이’ 중에서/ 문학과지성사/ 2005년평론가 김인환은 이렇게 말했다. “김영태는 자신의 내면에서 꿈꾸고 있는 단어들을 끄집어내는 놀라운 몽상가다.” 물론 이 말 뒤에는 “시선의 명상”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나는 김영태를 미니멀리스트로 본다. 미니멀리즘은 몽상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김인환의 지적도 맞지만 근본적으로 재현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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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3.12.28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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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의 부대는 어디인가 - 조인호 내 친구는 군대 가기 싫어서 하루 종일 통조림만 먹었다 우적우적 먹고 또 먹어서 뚱뚱한 참다랑어처럼 잔뜩 배가 불렀다 입영통지서가 날라오던 날 마침내 내 친구는 사라졌다 식탁 위 고요한 통조림 하나 달랑 남겨두었다 내 친구의 부대는 어디인가 나는 궁금한 마음에 훈련병의 편지를 뜯어보듯 통조림 뚜껑을 서걱서걱 잘라내었다 뻥 입 뚫린 통조림 속에는 국방색 모포 같은 새벽이 들어 있었다 훅 땀냄새가 풍겼다 소금에 절여진 내 친구의 군가 소리가 찌디짜게 울렸다 사방이 철책으로 둘러싸인 밀봉의 연병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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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3.12.14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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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별아저씨- 정현종 나는 별아저씨 별아 나를 삼촌이라 불러다오 별아 나는 너의 삼촌 나는 별아저씨 나는 바람남편 바람아 나를 서방이라고 불러다오 너와 나는 마음이 아주 잘 맞아 나는 바람남편이지 나는 그리고 침묵의 아들 어머니이신 침묵 언어의 하느님이신 침묵의 돔(Dome) 아래서 나는 예배한다 우리의 생(生)은 침묵 우리의 죽음은 말의 시작 이 천하(天下) 못된 사랑을 보아라 나는 별아저씨 바람남편이지. - 정현종 시집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8년선사시대의 주거는 동굴이나 움집에서 이루어졌다. 움집은 적당한 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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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3.11.29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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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소년이 있었다- 김근 새가 되어 날아갈 것 같아요 소년이 내게 말했다 고요히 나는 소년의 솜털 부숭한 귓불을 쓰다듬었다 이따금 소년의 귀에선 내가 쓰다 버린 문장들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 문장들을 기워 새를 만들었다 그보다는 내 가슴을 오려 새을 만들었으면 좋았을 걸 어두운 벤치 위에 소년은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동자를 흐리며 그만 눅눅한 공기 속으로 소년은 깃을 치며 날아갔다 나는 그저 돌아갈밖에 얇고 여린 소년의 껍질이 어깨 위에 가볍게 걸쳐진 채 자꾸 나부끼던 밤이었다 - 김근 시집‘당신이 어두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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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3.11.15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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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 이후- 배진우우리 집은 그 거리 끝이었다생각할 시간이 많았다한 사람이 잠들어 있다빈집에서늙은 거리에서갈가리 찢긴 편지에서방에서는 어느 곳에 서 있다가조금만 발을 옮겨도 가까운 창이 달라졌다지붕 위 그림자가 스치고 지붕 위 색을 더하고아픈 곳은 자주 자리를 옮겼다한 명이 살았고한 명이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한 사람이 잠들어 있다빛을 오래 가두고 싶었던 건축처럼 - 배진우 시집 ‘얼룩말 상자’/ 민음사/ 2023년우리는 벌거숭이 임금님의 우화를 알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인다고 하는 말에 사람들은 쉽게 속는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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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3.11.01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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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세목▥이다 좀 가져와 액자에 넣을 그림이 필요해 좀 빌려줘 편지 쓸 일이 생겼어, 의 ▥ ▥의 ▥이다 ▥과 ▥이다 읽을 수 있다 읽지 않을 수 있다 네모인 ▥, 옆면이 우글우글한, 책장에 넣는다. 낯설게 만들어 보자 연달아 말한다 거울 앞에 세워둔다 그것이 너는 누구니? 스스로 물을 때까지 기다린다 읽으면 똑똑해 지나 아니요 ▥은 읽는 것입니다 스테이플러 잘깍, 잘깍 잃습니다 잊는다 테이블이 필요해 생각을 한다 원하는 테이블은 ▥에게 묻는다, 다리 긴 테이블을 주문한다 어느 의자와도 짝이 될 수 있는 테이블 그 위에 ▥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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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3.10.17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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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갈- 원구식 참을 수 있다면 유혹이 아니다.저주받은 이 피의 계보는물처럼 흐르되결코 증발되지 않는 모래의 집적 속에 있다.시간의 문지기인 모래는 오래전에 아주 오래전에땅의 내장을 야금야금봉인된 시간 속에 넣어버렸다.그날 이후 시간의 지렁이들은 모두 죽어버렸다. 0.01초도 안 걸렸다.(사방에 지렁이가 없는 이유를이제 알 것이다)비를 뿌리는 한 때의 구름이죽을힘을 다해 겨우 빠져나간 뒤,사막은 정지된 풍경이다.그러니까, 굳어버린 시간의 독이다.이 시간은 모습도 없고, 소리도 없고시작도 끝도 없고, 위도 아래도 없고볼 수도 만질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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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3.10.05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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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숙(山宿) 산중음(山中吟) 1- 백석여인숙이라도 국수집이다모밀가루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웃간을 들믄들믄 더웁기도 하다나는 낡은 국수분틀과 그즈런히 나가 누어서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木枕)들을 베여보며이 산(山)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들에 새까마니 때를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그 사람들의 얼굴과 생업(生業)과 마음들을 생각해 본다 - 고형진 엮음 ‘정본 백석 시집’ 중에서/ 문학동네/ 2007년백석의 시는 따뜻하고, 권태롭고, 고요하다. 따뜻한 것은 목침들에 묻은 새까만 때를 보고 더럽다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베고 어딘가로 뿔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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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3.09.11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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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김남주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윗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 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김남주 시집 ‘사랑의 무기’ 중에서/ 창작과비평사/ 1989년김남주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가리켜 “그것은 무슨 거창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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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3.08.28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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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김수영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 김수영 시선 ‘거대한 뿌리’ 중에서/ 민음사/ 1995년풍경이 풍경을 반성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파경이라고 부른다. 상황이 상황을 반성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파국이라고 부른다. 졸렬과 수치가 자신을 반성하면 우리는 그것을 의(義)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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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3.08.11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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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흔- 박성준숲이 나를 불렀으니 이제 좁은 몸속옷장에 걸려 있는 바람들흐물거리는 빗장뼈를 밤의 내부로 가라앉히네두꺼운 승모근이 옷걸이마다 붙잡고 있던 바람꼬리 아홉 개 달린 별똥별여우야 가지마 가지마 나는 밤을 만지려고그림자에 스며들어 누웠네뻐꾸기 시계를 끌어안고 잠든 사내가옷장으로 들어가 바람이 되었다는 소문과그 소문에 오독당한 귀들이 떠오르네나사가 삐걱거리는 내 복부를 열어젖히고보았을까 그런 밤의 축축한 잔해들혈거하는 울음들이 무릎 꿇은 바람을 일으켜여우 굴에 벽화를 그리네, 밤과 내통한 빛이 그리워내 갈비뼈, 어두운 물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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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3.07.26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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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숨은 장마처럼- 류성훈 긴 숨은 장마처럼 젖어서 온다, 밤과 널 볼 수 없어 절상과 어울리는 침상은 엎지르기 전의 물잔은 아무도 걷지 않는 커튼과 내 뜨거웠던 도가니와 네 벌어진 솔기는, 그리고 비는 돌아가기 어려운 쪽으로만 아물었다 왜 이제 왔어 왜 아직 여기 있어 부러진 가지들을 이어 붙이는 계절을 가을이라고 부르고 싶어 터진 옷에서 터진 옷으로 갈아입는 우리의 밤은 꺾이지 않았어 그렇게 주여 주여 주여,를 외치며 충분히 쓰게 웃던 입술의 꿈이 뼈도 없이 창가에 서 있다 - 류성훈 시집 ‘라디오미르’ 중에서/ 파란/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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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시인
2023.07.13 1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