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현아 건축사

말을 걸어오는 공간이 있다. 어떤 건축물은 들어가는 순간부터 나오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말을 걸어온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설계자를 만나서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진다. 오랜 시간 머무르고 싶어진다. 노르웨이 건축이론가 슐츠(Christian Norberg-Schultz)는 이러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특별한 공간에 로사이(Loci)가 있다고 했다. 로사이를 ‘장소의 혼’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건물을 창조하는 업을 가진 건축사인 우리 모두는 혼이 숨쉬는 특별한 공간을 설계하는 것이 꿈일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공간을 만들 수 있을까? 한 분야에 지속적인 노력과 수고, 관심을 쏟는 몰입의 태도에서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가 공인한 전문가인 건축사는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건축사사무소에서 수년간 수련하며 힘겹게 건축사시험을 치른다. 그 후에도 끊임없이 공부하며 지속적인 자기개발을 해나간다. 건축물을 설계하는 분야에 가장 시간을 많이 쏟아온 전문가집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건축사를 전문가로 믿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민간 발주로 이루어지는 건축물의 디자인은 건축주의 경제적인 범위 안에서 많은 것들이 결정되었다. 허가만 내달라 가설계를 해달라는 요구가 이어졌다. 어렵게 당선된 설계공모안은 발주처의 의견조율과 수차례의 내역 조정 작업을 거쳐 의도와는 다른 모습으로 수정되기도 했다. 수의계약이나 입찰로 발주되는 설계건은 대부분 발주처의 의도대로 도면을 그려주는 선에서 진행되었다. 가장 우려가 되는 것은 현실에 맞게 필요한 도면을 신속하게 그려줘야만 사무실을 운영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공간의 질과 창의적인 공간은 결국, 그 사람이 사유하는 시간의 질로 결정되는 것인데, 시간을 갖고 노력할수록 건축사는 사무소 운영의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들은 필자가 건축사로서 경험과 지식이 부족한 이유가 첫째일 것이다. 같은 현실에서 훌륭한 건물들을 설계하는 선배 건축사님들이 많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하지만 건축을 건설의 동의어로 해석하는 현실도 일부 작용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경제성과 효율성만을 주요 가치로 여기다 보면 감동을 주는 공간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개인의 창의성에서 로사이는 태어나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현실이지만 우리는 지역사회와 환경의 필요를 충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건축의 본질은 문화이자 예술 그리고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최근 영화계에서 놀라운 성과를 낸 봉준호 감독은 아카데미 4관왕을 수상하며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The most personal is the most creative)”이라는 말을 남겼다. 건축사 개개인의 노력과 전문성이 인정받고 그 인정을 토대로 개인의 창의성이 발휘되는 문화가 건축계에서도 꽃피우는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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