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원호 건축사

삶은 흔들리며 사는 것이다. 걸을 때나 취침 때도 사람은 움직인다. 흔들리지 않으면 꺾인다. 높은 빌딩도 좌우로 흔들리며 서 있다. 풍파에 흔들림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비록 어려움 때문에 조금 흔들린다하더라도 그것은 똑바로 서기 위한 몸부림일 뿐일지니.

우리 건축계도 그렇게 흔들리면서 존재해 왔다. 경기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그때그때마다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왔다. 건축계가 가장 좋았던 때를 꼽자면 1997년 IMF가 터지기 전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모든 분야가 황금기였고, 곳곳에서 많은 건축 계획이 이뤄지고 있었다. 하지만 IMF 이후로 모든 계획들이 수포로 돌아갔다. 건축사사무소 직원들도 많이 감원됐다.

그 후 23년이 지나서 제4차 산업혁명이 시작된 지금, 현대인들은 하루 대부분을 건물 안에서 생활하지만 정작 어떤 사람이 그 건물을 설계했는지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건축의 전문가가 되었는지 그 속사정을 들여다보진 않는다.

간혹 TV 드라마나 영화에 건축사가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몇 년 전 여름, 꽃중년 바람을 일으켰던 인기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서 우아하면서도 성깔 있는 건축사가 등장했다. 그는 집에서 와인과 치즈를 먹으면서 건축모형을 만들고 평일 오후에는 친구들과 카페에서 수다를 떨거나 영화를 보는, 여유 있는 건축사였다. 2009년에 방영된 ‘결혼 못하는 남자’ 속 남자 주인공도 비슷했다. 압권인 것은 그가 여의도 불꽃축제를 보기위해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가 테이블에 와인까지 놓고 망원경으로 불꽃놀이를 즐기는 장면이었다. 이렇게 드라마 속 건축사들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경제력에 여유로움을 지닌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도 그럴까.

필자에게 직접 설계한 주택에서 사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다. 아파트에서 산다는 답변을 들으면 이내 실망한다. 건축사라 하면 자신만의 독특한 디자인과 설계가 돋보이는 집에서 살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요즘 대형 건축사사무소 외에는 소규모 건축사사무소들은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들었다. 인건비는 상승했고, 외주비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다. 현실 속 건축사가 과연 드라마에 나오는 건축사처럼 아름다운 직업인가? 몇 년 전, 우리를 첫사랑의 기억에 데려다놓았던 영화 ‘건축학 개론’에는 나름 현실적인 건축사가 등장했다. 밤샘 작업을 하다 책상에서 잠이 들기도 하고 "나도 퇴근이란 걸 좀 합시다. 이틀 동안 집에 못 갔네"하며 하소연도 한다. 이런 사무소는 요즘 없을 것이다. 최저임금제에다 52시간 근무시간에 묶여 칼퇴근을 하는 시대라 영화 속 대화는 작금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5년 간 공부하고 밤낮으로 졸업 작품을 준비한 대학생들이 졸업 후 자신의 앞길을 보장해줄 건축계 일자리를 찾기는 녹록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건설 현장마다 인건비 줄이기 위해 값싼 외국인 인부를 고용하고 있다. 건축사사무소 역시 인허가 서류와 허가 절차 과정 등의 업무들이 건축사 한명이 처리하기엔 역부족으로 늘어나고 있다. 5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3년 이상 실무 수련 과정을 거친 뒤 바늘구멍과 같은 건축사 자격시험을 통과해도 특별한 대가를 보장해주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바람 따라 세월 따라 흔들리면서, 휘어질지라도 부러지지 말고 꿋꿋하게 살아가기를 희망한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환경 창조자인 만큼, 우리에겐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자부심만큼은 충분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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