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온 우주는 설계마감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특별한 자연법칙(?!)을 건축설계전공자라면 누구나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건축설계’ 본연에 집중했던 탓에 그 외연(外緣)의 확장에 대해선 고민해 볼 여력이 없었다. 익숙한 설계프로세스는 언제나 빡빡한 스케줄로 좀처럼 변화를 시도하기 어려웠고 경제불황에 따른 설계시장의 위축, 건축주의 지나친 요구에 비해 턱없이 적은 설계비, 건축공간이 제공하는 삶의 질보다 부동산 가치가 우선시 되는 현실 등 열악한 환경에서, 건축사는 살아남기 위해 제 살 파먹듯 설계비를 깎거나, 유사한 디자인의 자기복제를 선택해야만 하는 곤란한 상황에 놓여왔다. 이러한 문제가 지속되면서 어떤 조건은 억압되고 어떤 조건은 무시되는 작업들이 반복됐고 일상건축은 부정적인 인식으로 채워졌다. 이로 인해 건축주의 만족도는 저하되고 설계자 또한 이상과 현실간의 괴리감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그동안 건축현실이 이러했다면, 다가올 인구감소와 저성장의 시대에는 건축이 어떤 방향성을 가질 것이며, 건축사는 어떤 전략을 추구해야 할 것인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앞으로의 건축은 기존의 공간가치를 재고하고 건축서비스의 질적 향상을 뚜렷이 추구하게 될 것이다. 이와 더불어 4차 산업혁명 시대로 접어들면서 각 산업 간의 경계가 불분명한 가운데 건축자체의 경계도 매우 모호해질 것이다. 따라서 기존에 고수하던 건축설계자 고유의 역할도 중요하겠지만 변화하는 시대에 대응할 수 있는, 건축과 연계되는 다양한 분야를 탐색하고 융합하여 차별성과 경쟁력을 갖추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미 이러한 변화와 시도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무수한 데이터들을 디자인 요소로 아름답게 구현하는, 건축과 설치미술의 영역을 융합한 건축디자인작업, 도시의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를 분석한 통합적 부동산 솔루션의 제안, 공간의 가치 극대화를 목표로 한 빅데이터 기반의 인공지능개발, 그리고 새로운 재료와 그 구축 방법에 관한 정보를 축적하고 재배치하는 일을 수행하는 연구도 시도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적응과제는 설계자에게 있어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요건이 되어가고 있다.
기존의 건축설계 방식으로는 공존할 수 없었던 가치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타영역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이해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건축을 넘어, 다양한 분야와의 소통을 건축에 녹여낼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건축사들은 우물 안 건축사에서 벗어나 주도적으로 새로운 시대의 삶을 디자인 할 수 있고, 그로 인해 건축에 대한 설레임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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