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삼호 건축사

얼마 전 만난 김 교수님(?)이 소설책을 추천했다. 건축사사무소 설계실을 배경으로 한 소설인데, 읽을 만해서 주변에 건축사들에게도 추천했는데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설계실이 배경으로 전개되는 얘기라 궁금해진다. 그리고 동종업종에 대한 관음증이 발동해서 추천한 책을 급히 사서 펼쳐보았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소설책 제목치고는 너무 서정적인 느낌이다. 일본소설로 원제목은 ‘화산 자락에서(火山のふもとで)’인데 의역한 제목이다.
작가 마쓰이에 마사시(松家仁之)는 건축공간을 디테일하게 묘사하여, 공간과 풍경이 어우러진 상황을 꽉 찬 그림처럼 연상케 할 정도로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시작과 함께 펼쳐지는 공간은 여름별장이다. 스토리 대강은 다음과 같다.
도쿄의 중심가에 있는 ‘선생님’(소설 속 대가로 등장하는 건축사)의 건축사사무소는 매년 7월 말이면 아사마산(淺間山) 중턱 해발 1000미터 고지에 위치한 여름별장으로 옮겨 설계실을 꾸린다.
시대 배경은 1980년대이며, 잘 나가는 ‘선생님’을 중심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상을 그려내고 있었다. 80년대는 내가 건축에 입문하고 실무를 한 시기와 상황과 유사하므로 동감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9시가 되자, 전원이 자기 자리에 앉아서 나이프를 손에 들고 연필을 깎기 시작한다.
연필 깎는 소리로 하루가 시작되는 것은 기타아오야마(동경사무소)나 여름별장이나 같았다.(P63)
“선을 그을 때 무의식적으로 숨을 멈추잖아? 그게 잘못된 거야. 누구나가 빠지기 쉬운 착각이지.”
“숨을 멈춘 순간 근육은 단단하게 긴장하지, 천천히 숨을 내쉬면 근육에서 힘이 빠져, 심호흡을 하면 릴랙스 한다는 것은 그런 얘기야, 그러니까 천천히, 힘주지 말고 숨을 쉬면서 선을 긋는 편이 팔 상태가 안정된다고”(P146)

지금이야 마우스로 톡! 톡! 치면 모니터에 선이 나오지만, 그 때 제도시간의 선긋기는 건축입문과정에 통과의례와도 같았다. 연필을 직각으로 세워 힘 조절 하며 한 땀 한 땀 그리면서 무아지경에 빠져들던 기억이 났다. 이러한 설계실의 하루 일과는 모니터를 켜면서 이메일 체크로 시작된다. 연필을 깎을 때 손가락에 퍼지는 나무결에 의한 미세한 파장과 흑연심지의 그을음 향이 그리워진다.
소설 속 주인공인 ‘나’(신입사원 사카니시)는 입사와 동시에 여름별장에서 현상설계 ‘국립현대도서관’ 모형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30년이 지난 후, 50대 중견 건축사가 되어 다시 그 여름별장을 찾아 당시 참여한 모형 앞에 서서 잠시 회상에 잠긴다.

모형 앞에서 잠시 망연자실한 채 서서, 나는 내안에서 무언가 억누를 수 없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내가 건축가로서의 걸음을 시작한 이 건물은 그 이전의 긴 증개축 역사를 포함하여 선생님의 그 주변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함께 여기까지 생명을 이어온 것이다. (P415)

중년의 건축사가 신입사원 시절 만든 모형을 보면서, 선생님과 작업에 관계한 수많은 선배 건축인들과 관계들을 추억하는 장면이다.
“나에게도 그러한 여름이 있었나!” 돌이켜 보게 된다.
어느새 7월의 말이다.
그 여름별장의 추억을 찾아 떠나고 싶다.

저작권자 © 대한건축사협회 건축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