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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과 과정의 창조성

기사승인 2019.06.03  17: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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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ion(창조)에서 intervention(중재, 개입)으로”

이 말처럼 현 시대 설계패러다임의 변화를 잘 나타내는 말은 없을 듯하다.
하브라켄(N. J. Habraken)은 현대도시의 복잡성을 담지하고 유기적 시스템으로서의 도시를 지속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건축사는 ‘창조자’에서 ‘환경게임의 조력자(agent)’로 한 발 물러서야 함을 강조한 바 있다. 또한 ‘Laziness’, ‘작가성의 유보’ 등은 현대 건축사들의 주요 설계전략의 하나가 되고 있다. 최근 프리츠거상의 수상자들-지역성을 기반하여 건조환경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다루어온-의 면면을 보아도 21세기의 건축과 도시의 과제와 설계자의 역할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2019년 현재 세계의 도시화율은 55.7%, 우리나라의 도시화율은 81.4%에 달하며 이러한 속도로는 2050년까지 세계는 68.4%, 우리나라는 인구의 86.4%가 도시지역에 거주하게 된다(통계청.2018.10). 도시의 밀도는 높아지고 대규모 신축의 가능성은 낮아진다. 거대 금융과 부동산 산업을 담보로 하는 대규모 프로젝트 신화의 몰락, 그리고 급격히 증가하는 리노베이션 프로젝트의 비율도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더 나아가 저성장, 저출산, 고령화로의 인구구조의 변화는 이전의 방식에서 벗어나 도시민들의 삶의 방식, 경제활동, 건조환경의 수요의 변화에 대응하는 새로운 지혜를 요구한다.

건조환경의 ‘지속가능성’의 무게가 더욱 깊이 있게 다가오는 오늘날, 기존 도시의 맥락에서 가능성을 찾고 새로운 영역을 발굴하여 도시민들의 삶의 질을 회복하려는 창조적인 노력들이 세계 곳곳에서 실행 중이다. 지난 2013,4년 필자가 델프트 공과대학에서 방문교수로 체류했던 기간에 가장 많이 접한 이야기가 바로 “creation(창조)에서 intervention(중재, 개입)으로”였다. 스튜디오 수업에서는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암스테르담 등을 비롯한 유럽의 도심부에 방치되어있던 건축물들의 ‘비어있는 공간들(vacant space)’을 지속가능한 방안으로 활성화할 수 있는 도시건축적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진행되고 있었고 당시 실무현장에서 제안되었던 유럽의 젊은 건축집단의 용감무쌍한 실험들은 4,5년이 지난 현재, 혁신적인 도시재생의 사례로서 현재진행형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곳곳에서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사례들을 한 두 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필자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이해해 주시길), 거대 담론과 대규모 마스터플랜(materplan)의 삭제로부터 시작하는 그들의 접근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던 지난 시절의 ‘창조적 자신감’을 과감히 내려놓고 최소한의 ‘개입자’로서의 건축사의 태도를 갖추는 것으로 출발한다. 이미 건축디자인 전문능력을 탑재한 전문가인 그들은 지역과 함께 뛰는 동반자의 자세로, 로컬의 과제와 주민들의 요구에 충분히 귀를 기울이며 현장의 맥락과 삶의 단서로부터 시작하여 해당지역의 시간적, 장소적 스토리를 연계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공간의 소유감과 주권을 주민들에게 부여하는 지속가능한 과정을 ‘설계’한다. 그들의 창의성은 그 태도와 과정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나라에서 진행 중인 대규모 도시재개발에서 도시재생뉴딜로의 재생의 소규모화, 생활SOC로 대별되는 도시공공공간의 재구조화, 그리고 사용자 중심의 과정을 강조하는 학교공간혁신 프로젝트 등 또한 이러한 배경에서 함께 읽힌다. 더불어, 최근 젊은 건축 집단의 시도들- 건축설계와 동네경제, 살림을 접목하는 다양한 스타트 업(start-up)들이 ‘동네 재생’을 견인하는 새로운 주체로서 흥미롭다. 작고 점진적인 실험과 변화가 점차 큰 변화로 이끌어 내는 출발이 됨을 시사하고 있다.

좋은 건축사란 무엇일까,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일까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는 시점이다. 미래의 건축과 도시를 위하여 다양한 가치를 품도록 건축설계의 영역이 넓어지기를 기대한다. 삶과 경험을 중심으로 하여 건조환경을 대하는 통합적 태도, 단지 물리적인 설계의 범주에서 벗어나 지역의 맥락에서부터 출발하여 사람과 심리와 행태를 반영하고 변화하는 수요와 삶의 다이나믹을 수용하는 ‘공간의 운용(operation)’, 시간과 진화의 속성을 품는 설계방법론의 모색이 필요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건축전문교육과정에서도 변화가 필요하다. 종래의 설계수업방식과 병행하여 지금의 학생들이 향후 만나게 될 미래 건조환경에서의 수많은 가능성을 탐지하고 한정된 자원 하에서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능력, 새로운 프로젝트들을 기획하고 설계의 마지막까지 끌고 갈 의지와 연대의 능력을 갖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로컬의 도시문제를 글로벌한 이슈로 끌어올리는 기획력, 실천적 생각과 태도를 배양해주어야 한다. 학생들의 기질과 능력별로 건축의 기획, 설계, 구축, 운영 등의 전 단계에서 충분하게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의 씨앗을 심고, 거기에 맞는 지식의 습득기회 제공이 보완되었으면 한다.

현재 분주히 진행 중인 도시재생 뉴딜사업에서의 내용적 강화도 필요하다. 가이드라인에서는 사업지로 선정된 각각 다른 ‘동네’의 특성화를 유도하는 내용이 보이기는 하나, 단지 대상지를 발굴하기 위한 검토에서 머물지 않고 충분한 시간을 갖고 치밀한 리서치를 통해 동네의 특유한 도시공간구조, 건조환경의 독특한 성격, 주민들의 특성, 인구구조, 삶의 패턴, 동네의 경제와 문화를 찾아내고 그 맥락에서 동네만의 재생의 색깔과 지속가능성을 찾는 준비가 보강되었으면 한다. 그 자체가 동네주민들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가꿀 수 있는 동네커뮤니티 문화를 찾는 주도권을 갖게 하는 주요한 과정이다. 사업자 선정에서 또한 동네의 물리적 비물리적 가능성을 리서치하는 배점을 강화하여, 의지와 태도를 가지고 창의적인 동네과제를 발굴하고 실천할 능력과 주민과의 소통능력을 갖는 사업자를 선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건축사의 업역 또한 지속적으로 확장해 나가야 한다. 현재의 도시건축의 어려움 속에서도 생존을 넘어 건축사들의 경쟁력을 함께 높일 수 있는 방법으로는, 새로운 생각들, 역동적인 에너지들을 발굴하는 노력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안의 경계를 늦추고 다양한 주체들, 전문영역, 행정영역 등과 연대하고 연구하여 새로운 도시건축이슈를 발견하고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건축 실무영역을 넓히는 일과 깊어지는 일을 병행해야 한다. 가장 가능성 있는 시작은 간단하고 작은 곳에서, 무엇보다도 나의 편견을 내려놓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유명희 논설위원 울산대학교 건축학부 건축학전공 교수 대한민국 건축사, 공학박사 n_studio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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