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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응(coordination) 의 시간들

기사승인 2019.04.01  11:4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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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집의 시간들’은 지금은 재개발로 인해 사라지고 없는 둔촌주공아파트를 주인공으로 다룬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내밀하고 익숙한 생활의 장소인, 아파트 세대 내부 공간들과 그곳에서 보이는 단지의 풍경과 소리, 그리고 그 집에 사는 이들의 목소리이다. 카메라는 그들의 목소리를 따라, 같지만 전혀 다른 집들의 구석구석을 아주 천천히 비춘다. 거의 정지화면과도 같은 장면과 목소리는 필자로 하여금 건축의 물리적인 실체에 달려 가려는 강박과 직업적 관성을 잠시 멈추고 겸허하게 집의 삶, 집과 단지 곳곳에 박힌 사람들의 기억과 시간들로 몰입하게 만든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상하게도 영화 ‘말하는 건축가’에서 정기용 선생님이 사랑하셨다던 작은 창으로 들어오던 오후의 긴 햇살이,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어딘가를 응시 하는 듯했던 선생님의 시선이 두고두고 겹쳐 보이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최근 건축계에서 보이는 변화마다 건축코디네이터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건축서비스산업진흥법에서 공공건축의 기획업무와 기획업무절차를 명문화하였고 지역공공건축과 지역개발에 있어 지역 총괄건축가와 건축 코디네이터의 역할을 확대하였다. 이에 전국적으로 주요도시의 총괄건축가와 공공건축가들이 선정되고 있다. 2019년 국토교통부 주요이행계획에 따르면 도시재생뉴딜사업에서 주민참여확대를 더욱 강조하고 있는데, 도시재생뉴 딜사업을 가속하여 2017년 선정된 68곳을 연내 모두 착공하고 2018년 선정된 99곳 중 최소20%를 상반기 조기착공, 그리고 2019년의 신규사업은 100곳 내외로 조기선정을 계획하고 있다. 국토부는 또한 지자체와 함께 생활 SOC사업과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연계 실시하기로 하였으며, 서울시는 공공건축가를 넘어 ‘서울형 마을건축가’를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 울산 북구 염포동 ‘희희낙락 여럿이행복한길 프로젝트’, 2017마을 어르신들과 학생 퍼실리테이터 집단 ‘소디랩’과 함께한 워크숍을 통해 마을길을 둘러싼 반복되는 민원을 청취하는 동시에, 마을 건조환경과 주민 의식, 행동패턴 리서치를 병행하였다. 분석을 통해 길 하나에서 반복되어 온, 물리적 환경 문제로만 보였던 단순한 민원 하나가 주민 행동패턴과 정서, 물리적 문제, 행정지원 미숙, 주민 간 규약과 실천부족문제로 세분되었다. 건축코디네이터의 역할은 문제의 다각적 원인의 실체를 드러내어 해결을 위해서는 주민, 행정, 건축분야의 상호 긴밀한 협력이 ‘실천’되어야 함을 모든 주체가 현실적으로 마주하게 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한편, 건축코디네이터가 필요한 영역은 교육계의 변화에서도 감지된다. 지난 1월 교육부는 ‘학교 시설 환경개선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학교의 노후화 개선, 안전한 학교환경, 그리고 사람중심의 미래교육에 대응하는 학교공간혁신에 있어 학생중 심의 사용자참여를 도입한 설계프로세스를 매뉴얼 화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필자는 이러한 변화의 양상이 반갑지만 막상 현장에서는 충분히 준비된 ‘플레이어’가 턱없이 부족한 이 상황, 수요가 준비된 공급을 압도하는 급격한 속도에 당혹스럽고 걱정스럽다.
필자는 건축 ‘코디네이터coordinator’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종래의 ‘조정자’에서, 이제는 ‘조정’을 넘어 사회적 ‘협응coordination’을 이끌어야 하는 시대적 역할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다루는 영역 또한 단순한 건축물을 넘어 인간의 거주에 영향을 미치는 연속체로서의 건조환경의 전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건축 코디네이터는 기획업무의 보수를 강화하고 인력을 투입한다고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에 게는 그간의 오랜 건축 경험을 바탕으로 한 특별한 노력과 훈련의 시간이 별도로 주어져야 한다.

▲ 난장, 학교를 뒤집다. 배움중심 학교상상프로젝트. 2019울산시교육청 혁신교육추진단, 건축교육전문가 홍경숙 P_P.Y 대표와 함께 기획ㆍ진행한 프로젝트. 배움공간의 의사결 정자인 다양한 주체, 즉, 학생, 학부모, 교원, 교육행정가, 건축사를 한 자리에 모아 배움문화와 학교공간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상상하는 워크숍을 열었다. 특색 있고 지속가능한 학교공간혁신을 위해선 물리적 개선에 바로 뛰어들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주체와의 대화와 합의를 통한 배움문화혁신이 앞서야 함을 모두 공감하였다.

그는 의사결정과정에서 주민과 사용자의 참여의지, 신뢰감, 소유감, 자신의 환경에 대한 애착을 견인하는 것이 결국 지속가능한 건축과 도시를 만든다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윤리적 이며 인문학적 상상력과 인내를 가지고 그 지역 고유의 물리적, 비물리적 특수성과 고유문화를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예민한 관찰’과 ‘경청’을 통해, 혼자서는 구할 수 없을 복잡다난한 도시와 사회의 정보를 수집하고, 겸허한 태도와 열린 마음 으로 때로는 갈등상황에 직면한 다양한 주체들의 욕망을 조정하고 때로는 예기치 못한 그들의 영감과 피드백을 수용하되, 비전문가들의 의식과 아이 디어를 수준 높은 건축적 정보와 디자인으로 번역해 낼 줄 아는 전문적인 분석능력을 가져야 한다.
프로젝트별 특성을 고려하여 다양한 방식의 프로 세스를 개발할 수 있어야 하고 최근 부상하는 ‘사회적 플랫폼’ 등의 소통과 작동방식을 활용하여 프로젝트의 특수성을 견인할 수도 있어야 한다.
건조환경에 대한 의사결정과정에서 주민과 행정부 문, 다양한 전문분야와의 긴밀한 소통체계를 만들 어야 하되, 무엇보다도 ‘의사결정의 타이밍’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능력이 구비된 훌륭한 건축 코디네이터가 준비되었다고 해도, 프로젝트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우수한 행정력이 뒷받침되어 기획과 실행 단계 단계마다 긴밀한 연결고리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성공적인 ‘협응’을 위한 조건으로 필자는 몇 가지를 당부하고 싶다.
첫 번째, 사회적 협응을 위한 충분한 시간. 참여 설계의 방식에서 형식주의(tokenism)에 머물지 않으려면, 아무리 노련한 코디네이터라 해도 비전문가인 지역주민이나 사용자들에게는 마음을 열고 소통하는 절대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과의 지속적인 소통을 위해서는 코디네이터에게 그들의 메시지 이면에 있는 의식과 문화적 정서를 이해하고 이를 전문적으로 번역하여 정보화하는 시간 또한 충분히 주어져야 한다.

두 번째, 코디네이션 업무에 대한 충분한 보수. 그동안의 코디네이터의 크고 작은 일들이 단순한 재능기부의 일부로 여겨지기 일쑤였다. 코디네이터의 업무는 생각보다 ‘잡다’하고 부침이 많아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와 시간, 그리고 남모르는 정교한 정성이 투입되어야 하는 일이다 보니 프로젝트가 끝나면 ‘번 아웃(burn-out)’을 겪기도 한다. 필자 주변의 소양이 이미 충분한 건축사들도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비롯하여 현장에서 필요한 코디네이터 일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고, 이는 현장의 플레이어 부족의 직접적인 이유가 된다. 건축사들의 업무는 이제 짓기만 하는 작업에서 머물지 않고 때로는 짓지 말아야 할 것 또한 신중하게 제안하고 결정하는 것으로 확장될 수 있어야 하고, 그 전문적인 판단과 공공적 역할에 대한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아야 한다.
세 번째, 충분한 학습의 선행. 모든 건축사가 모두 코디네이터가 될 필요는 없고 건축사가 되기 위해서 모두 코디네이터 양성과정을 이수할 필요는 없지만, 건축계의 패러다임 변화를 볼 때, 프로젝트의 다양한 단계에서 소통과 대화를 이끌어야 하는 크고 작은 코디네이션 업무는 반드시 접하게 될 것이다. 건축사들의 업무 또한 설계중심, 건축 기획, 새로운 방식의 건축교육 및 플랫폼에 최적화된 업역으로 분화되어 가고 있다. 다양한 능력 배양과 진로의 가능성을 열어주기 위해서라도 건축학교육 현장에서는 물론, 건축사의 실무교육, 공무원, 그리고 좋은 주민과 건축주가 되기 위한 맞춤형 건축교육이 필요하고. 지면의 한계상 다루 지는 못했지만, 건축 퍼실리테이터 양성을 위한 교육과정도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된다.

▲ 어린이 테마파크 기본구상을 위한 어린이 상상단 놀이패턴 연구, 2015‘테마파크’의 전형성을 극복하고 ‘놀이’의 지속가능성을 담기 위해 울산 5개 구군 150명의 어린이와 부모를 대상으로 ‘어린이상상단’을 구성하여 놀이의식과 패턴을 연구하고 이를 토대로 ‘함께 자라는’ 어린이 놀이마을을 기획하였다.기획 마지막 단계에 행정조직 개편으로 기획 의도가 실행까지 연결되지 못한 아픈 사례이다. 기획과 실행사이의 연결 고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제대로 경험한 프로젝트.

마지막으로, 의사결정의 일관성과 지속성의 확보. 초기에 결정된 기획의도와 기본 방침이 프로젝트의 각 단계마다의 의사결정에 일관되게 적용되어야 결국 주민과 사용자에게 우수한 질의 결과물이 주어지게 된다. 성공적인 프로젝트의 완수를 위해서 행정부문은 충분한 신뢰와 파트너십을 가지고 코디네이터의 권위를 지속적으로 존중해 주어야 한다

 

유명희 논설위원 울산대학교 건축학부 건축학전공 교수 대한민국 건축사, 공학박사 n_studio 대표.

<저작권자 © 대한건축사협회 건축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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