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살이 고운 10월 하순, 야외를 걷고 싶어서 옷을 갈아입고 챙 넓은 모자를 찾으니 보이지 않는다. 모자가 있을 만한 곳을 아무리 찾아도 없다. 잃어버렸나? 잃어버렸다면 언제, 어디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요즘 부쩍 건망증이 심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부주의로 그 동안 햇빛을 가려준 고마운 모자를 잃어 버렸구나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크다. 그래서 가장 최근에 그 모자를 쓰고 외출한 것이 언제였나를 생각해 보니 지난 10월 중순에 친구들과 걸었던 지리산 둘레길 이었다.
둘레길 2코스 운봉-인월, 3코스 인월-금계 구간 중 장항교까지 총 16~17km를 걸었다. 출발지점인 운봉읍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을 톱아보니 장항교에서 인월까지 시내버스, 인월에서 늦은 점심 식사, 인월에서 다시 시내버스로 운봉읍. 잃어버릴만한 곳은 시내버스 아니면 점심을 먹은 식당이다. 두 곳 중 가장 의심스러운 곳이 식당이었다. 내가 돈 관리를 했던 탓에 식사 후 계산을 하러 황급히 일어나느라 미처 모자를 챙기지 못한 것 같다. 그렇게 식당에서 잃어버린 것이라고 스스로 결론짓고 나니 서운한 마음이 더 들고 부주의에 대한 자책감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우리들은 살면서 물건이나 사람을 잃는 경우가 있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는데 소중하게 보관했던 초, 중, 고등학교 시절의 시험지나 노트, 책 등을 잃어버린 일이다. 큰형님 댁에서 대학을 다닐 때도 어떻게든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는데 형님 댁에서 나와 직장을 다니며 가져가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큰형님이 집을 헐고 새로 지으면서 몽땅 버렸다. 그 때의 서운함과 후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마치 내 젊은 학창시절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사람간의 관계에서도 소중한 누구를 잃는다는 것은 고통이요 후회스러운 일이다. 부모, 형제 등 가족과의 사별(死別)이 그것이요 친한 친구나 관계가 좋았던 사람과 어떤 오해나 갈등으로 관계가 끊어지는 것 또한 그렇다. 누군가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잃고 나서야 그것의 의미를 알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다른 것을 중요시 하다가 정작 소중한 것을 놓친다. 어린 시절 내 방 네 방 따로 없이 여럿이 살을 부비며 가족이 한 집에 살았던, 대다수 사람들이 다소 남루하고 조금은 부족하게 살았던 그 시절이 얼마나 소중했던가를 그 때는 몰랐다. 이제 부모님은 손닿지 않는 아주 먼 곳에, 형제들은 각기 다른 지역에서 각자의 삶을 영위하기 바쁘다.
김소연 시인은 「마음 사전」에서 중요한 것과 소중한 것의 차이점을 이렇게 말한다.

‘소중한 존재는 그 자체가 궁극이지만, 중요한 존재는 궁극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다. 돈은 전혀 소중하지 않은 채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여
있다. 너무 중요한 나머지 소중하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우리는
중요한 것들의 하중 때문에 소중한 것들을 잃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며칠 전 전혀 엉뚱한 곳에서 모자를 찾았다. 배낭과 모자를 세탁하려다 못하고 우선 모자를 배낭 속에 넣어 두고는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갑자기 머릿속이 환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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